루이스 멈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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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멈퍼드는 미국의 저술가, 역사학자, 사회 비평가로, 도시와 기술,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시했다. 1895년 뉴욕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멈퍼드는 뉴욕 시립 대학교 등에서 수학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저널리스트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잡지에 기고했다. 그는 건축 비평가로 활동하며, 《기술과 문명》, 《역사 속의 도시》 등 주요 저서를 통해 기술과 문명의 관계, 도시 계획, 인간의 조건 등을 탐구했다. 멈퍼드는 기술을 폴리테크닉과 모노테크닉으로 구분하고, 현대 도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생물기술적 접근을 제시했으며, 1964년 대통령 자유 훈장, 1976년 시노 델 두카 세계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사상은 자크 엘룰, 머레이 북친 등 여러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사회에도 기술과 도시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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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멈퍼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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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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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스 멈퍼드 |
출생 | 1895년 10월 19일 |
출생지 | 미국 뉴욕 주 플러싱 |
사망 | 1990년 1월 26일 |
사망지 | 미국 뉴욕 주 아메니아 |
직업 | 역사학자 작가 |
장르 | 역사 기술 철학 |
학력 | 뉴욕 시립 대학교 뉴스쿨 |
주요 작품 | 역사 속의 도시 기술과 문명 기계의 신화 |
수상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메달 (1969년) |
학문 분야 | |
주요 관심사 | 역사학 건축학 |
근무지 |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
2. 생애
루이스 멈퍼드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미국 해군에 복무했고, 제대 후 저널리스트와 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다이얼 지의 동료였던 소피아 비텐버그와 결혼했다. 1923년, 패트릭 게디스의 조수 제안을 거절하고 미국 지역 계획 협회(RPAA)에 가입하여 간사 및 홍보를 담당하며 자신의 이념과 계획 사상을 잡지에 발표했다.
1925년에는 장남 게디스가 태어났고, 퀸스 롱아일랜드 시티의 서니사이드 가든스로 이사했다. 같은 해 스위스 제네바 시의 국제 하계 학교에서 강연을 했고, 벤데잉겐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관한 첫 평론을 썼다. 1926년에는 뉴욕주 아메니아 근교의 리즈빌에 여름 별장을 빌렸고, 1927년에는 라이트를 처음 만나 플라자 호텔에서 점심을 함께했으며, 시카고 지역으로 여행하며 라이트의 작품을 견학했다.
1929년 다트머스 대학교 객원 교수로 취임했지만 다음 해 사임하고 뉴욕주 리즈빌의 농가를 구입하여 여름 별장으로 삼았다. 1931년 뉴요커 지의 건축 비평 담당이 되어 '더 스카이라인'란의 시평을 담당했다. 1932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근대 건축 국제전" 주택 계획 부문 담당으로 초청받았고, 이 시기 유럽에서 근대 건축을 연구했다.
1936년 뉴욕주 리즈빌의 농가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정착했다. 1939년 저서를 통해 미국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것을 주장했다. 1942년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44년 아들 게디스가 전사한 후에는 핵무기 폐지 운동에 관여했다.
1948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교, 1951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객원 교수가 되었다. 1957년부터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객원 교수를 지냈고, 1963년 뉴요커 지의 건축 비평에서 물러났다. 1990년, 뉴욕주 리즈빌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루이스 멈퍼드는 1895년 뉴욕 퀸스 플러싱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2]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어머니와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1912년 스터이베선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시립 대학교에 입학했다.[2] 그 후, 컬럼비아 대학교, 뉴스쿨 대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등에서도 공부했다.1914년, 패트릭 게디스의 저작을 접하고 사숙했지만, 같은 해 결핵으로 인해 뉴욕 시립 대학교를 중퇴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지 못했다.[10][3] 1917년부터 패트릭 게디스와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무선 전기 기술자로 배정되었다.[10][3] 1919년에 제대하여 영향력 있는 모더니즘 문학 잡지인 ''다이얼''의 부편집자가 되었다.
2. 2. 경력
1895년, 롱아일랜드 뉴욕시 퀸스구 플러싱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맨해튼구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어머니와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1912년, 스튜이베선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시립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컬럼비아 대학교, 뉴스쿨 대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등에서도 수학했다. 1914년, 패트릭 게디스의 저작을 접하고 사숙했지만, 같은 해 결핵으로 인해 뉴욕 시립 대학교를 중퇴했다. 그 때문에 학사 학위는 취득하지 못했다. 1917년부터 패트릭 게디스와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임무 중에 몇몇 저술을 했다. 제대 후 저널리스트, 평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다이얼 지사에 근무했으며, 사회학 리뷰지, 프리먼지, 뉴 퍼블릭지, 미국 건축가 협회 회지 등에 기고했다. 미술이나 연극, 문학 관련에서 정치에 관한 비평 집필을 담당했다.
1921년, 다이얼지 동료 소피아 비텐버그와 결혼했다. 1923년, 패트릭 게디스의 조수 제안을 거절하고, 미국 지역 계획 협회에 가입했다. 간사 및 홍보를 담당했으며, 자신의 이념과 계획 사상을 잡지에 발표했다. 1925년, 장남이 태어나 게디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또한 이 해, 퀸스구 롱아일랜드 시티의 서니사이드 가든스로 이사했다. 스위스 제네바 시의 국제 하계 학교에서 강연했으며, 벤데잉겐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관한 첫 번째 평론을 집필했다.
1926년 뉴욕주 아메니아 근교의 리즈빌에 여름 별장을 빌렸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지만, 1927년 라이트를 처음 만나 플라자 호텔에서 점심을 함께했으며, 시카고 지역으로 처음 여행하며 라이트의 작품을 견학했다. 1929년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로 취임했지만 다음 해 사임하고 뉴욕주 리즈빌의 농가를 구입하여 여름 별장으로 삼았다.
1931년 뉴요커지의 건축 비평 담당이 되어, 「더 스카이라인」란의 시평을 담당했다. 1932년, 필립 존슨으로부터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근대 건축 국제전" 주택 계획 부문 담당으로 초청받았다. 「주택 계획」을 넘어선 소론을 기고했다. 탈리에신 펠로우십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은 거절했다. 또한 이 시기 유럽에서 근대 건축을 연구하고 있다.
1936년 뉴욕주 리즈빌의 농가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정착했다. 1939년 저서를 통해 미국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것을 주장했다. 1942년, 스탠퍼드 대학교 수수로 취임했다. 1944년, 아들 게디스가 전사했다. 전후에는 핵무기 폐지 운동에 관여했다.
1948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교, 1951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객원 교수가 되었다. 잠시 끊어졌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의 서신 교환을 재개했다. 1957년부터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객원 교수. 1963년 뉴요커지의 건축 비평에서 물러났다.
2. 3. 은퇴와 죽음
자신의 집이 있는 뉴욕주 아메니아에서 1990년 1월 26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9년 후 그의 집은 국가 사적지 등록부에 등재되었다. 그의 아내 소피아는 1997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3. 사상
루이스 멈퍼드는 저서 《인간의 조건》(1944)에서 자신의 인류 연구 방향을 "유기적 인본주의"로 정의했다.[12] 그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한계를 강조하며, 공기, 식량, 물, 공간의 질과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이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멈퍼드는 기술과 진보가 유기적 인본주의의 제어 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뇌가 과도하게 활동적일 수 있지만, 의미 있게 사용되지 않으면 잠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멈퍼드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주요 특징은 도구(기술)가 아닌 언어(상징)의 사용이라고 믿었다.[12] 그는 정보와 아이디어의 공유가 초기 인류 사회의 자연스러운 특징이었으며,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 기반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테크닉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기술뿐만 아니라 예술, 기술, 솜씨를 포함하는 그리스어 ''테크네''에서 유래한 것이다.[12] 멈퍼드에게 테크닉스는 사회적 환경과 기술 혁신의 상호 작용을 의미했다.
멈퍼드는 《기술과 문명》(1934)에서 기술을 폴리테크닉과 모노테크닉으로 구분했다. 폴리테크닉은 다양한 기술 방식을 활용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복합적인 프레임워크인 반면, 모노테크닉은 그 자체만을 위한 기술로, 인류를 억압하는 기술이다. 그는 현대 미국의 교통망이 자동차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모노테크닉하다고 비판하며, 보행, 자전거, 대중교통과 같은 다른 교통 수단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멈퍼드는 현대 기술의 끊임없는 확장, 생산, 교체를 강조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가 기술적 완벽성, 내구성, 사회적 효율성, 전반적인 인간 만족도에 반한다고 보았다. 그는 현대 기술이 소비자 신용, 할부 구매, 계획적 구식화와 같은 장치를 사용하여 지속적이고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멈퍼드는 또한 거대한 계층적 조직을 인간을 구성 요소로 사용하는 기계인 ''메가머신''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현대의 기술 관료주의적 핵 강대국에서 나타나는 메가머신의 예로 크렘린과 펜타곤으로 대표되는 소련 및 미국의 권력 복합체를 들었다. 그는 피라미드 건설자, 로마 제국, 세계 대전의 군대가 이전의 예라고 설명했다. 멈퍼드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이 메가머신의 극단적인 목표를 순순히 수행하려는 사람들을 "아이히만"이라고 통칭했다.
멈퍼드는 초기 저서에서 인간의 능력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이후 2차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 발전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초기 건축 비평은 헨리 홉슨 리처드슨, 루이스 설리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역사의 도시》(The City in History)는 1962년 미국 전미 도서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16] 이 책에서 멈퍼드는 도시 팽창을 비판하며, 현대 도시의 구조가 서구 사회의 많은 사회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시 계획이 사람과 생활 공간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세 도시를 이상적인 도시의 기반으로 삼았다.
멈퍼드는 도시가 "대지의 산물...자연의 사실...인간의 표현 방식"이라고 믿으며 도시 문화를 비판했다.[17] 그는 "대도시 금융", 도시화, 정치, 그리고 소외를 경계하며, "도시의 물리적 설계와 경제적 기능은 자연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 공동체의 정신적 가치에 종속된다."라고 주장했다.[18]
멈퍼드는 생태학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술을 '생물기술'이라고 불렀다.[13] 그는 생물기술적 의식과 공동체가 인간 생명의 본질에 대한 다윈적 사고의 진화에서 더 늦은 단계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거대기술"의 자멸적 동기를 떨쳐버리는 데 필요한 기술이라고 믿었다. 멈퍼드는 부상하는 생물기술을 신다윈주의적 의식, 즉 산업화 이후의 사고 형태로 여겼다.
멈퍼드는 생물기술 사회는 기술이 끊임없이 확장되어 자체적인 힘을 확대해야 한다는 거대기술적 망상에 굴복하지 않고, "생존 가능성"을 창출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러한 망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력 추구라는 거대기술 대신, 생물기술 사회는 멈퍼드가 "풍요"라고 부르는 것, 즉 자원과 필요 간의 항상성 관계를 추구할 것이다.
멈퍼드는 도시 계획 분야에서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주목한 최초의 도시 계획 학자 중 한 명이다.[20][21] 그는 저서 ''살아있는 신앙''(1940)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영적인 삶과 실질적인 삶을 분리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양쪽에 똑같이 작용하는 저주이다.[22]
3. 1. 유기적 인본주의
멈퍼드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1944년 출간)에서 인류 연구에 대한 자신의 방향성을 "유기적 인본주의"로 특징지었다. 이 용어는 인간의 가능성에 한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이 한계는 인간 신체의 본성과 일치한다. 멈퍼드는 공기 질, 식량 가용성, 물의 질, 공간의 편안함의 중요성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사람들이 번성하기 위해 존중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에서 기술과 진보는 유기적 인본주의가 제동 역할을 하는 한 멈춰지지 않는 기차가 될 수 없었다. 실제로 멈퍼드는 이 관점에서 인간의 뇌를 과잉 활동적인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인류가 자연의 많은 위협을 정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지만, 의미 있게 자극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잠재적으로 나쁜 일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자연적 특성에 대한 멈퍼드의 존중은 그에게 기술과 기법을 전반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다. 따라서 도시와 기술 구현에 대한 그의 비판과 조언은 그가 지지했던 유기적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근본적으로 구성되었다. 멈퍼드는 유기적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마셜 맥루한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는데, 맥루한은 자연 환경이 아니라 기술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본성을 형성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멈퍼드는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이는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일 뿐이었다.멈퍼드는 인류를 정의하고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주로 도구(기술)의 사용이 아니라 언어(상징)의 사용이라고 믿었다. 그는 원시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정보와 아이디어 공유가 초기 인류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사회가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사회의 기초가 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인류가 미래로 나아감에 따라 이러한 정보 "풀링" 과정이 지속되기를 희망했다.[12] 멈퍼드가 그의 저서에서 "테크닉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멈퍼드에게 기술은 테크닉스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어의 더 넓은 정의인 ''테크네''는 기술뿐만 아니라 예술, 기술, 솜씨를 의미하며, 테크닉스는 사회적 환경과 기술 혁신의 상호 작용, 즉 사회의 "소망, 습관, 아이디어, 목표"와 "산업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멈퍼드는 『기술과 문명』의 서두에서 "다른 문명들은 테크닉스의 방법과 목적에 의해 심오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명백히 높은 수준의 기술적 숙련도를 달성했다"라고 썼다.
3. 2. 기술 비판: 폴리테크닉과 모노테크닉
기술과 문명(1934)에서 멈퍼드는 기술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폴리테크닉(Polytechnic)''': 다양한 기술 방식을 활용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복합적인 프레임워크.
- '''모노테크닉(Monotechnic)''': 그 자체만을 위한 기술로, 자체적인 궤적을 따라가며 인류를 억압하는 기술.
멈퍼드는 현대 미국의 교통망이 자동차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모노테크닉"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동차 도로가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보행, 자전거, 대중교통과 같은 다른 교통 수단의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다. 또한 멈퍼드는 매년 자동차 사고로 인해 수천 명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하는 것은 미국 사회가 고속도로 교통에 극도로 의존하기 때문에 치르는 의례적인 희생이라고 설명한다.
3. 3. 메가머신
멈퍼드는 기술의 현대적 경향을 비판하며, 이는 끊임없는 무제한적 확장, 생산, 교체를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목표가 기술적 완벽성, 내구성, 사회적 효율성, 전반적인 인간 만족도에 반한다고 보았다. 그가 "거대기술(megatechnics)"이라고 부른 현대 기술은 소비자 신용, 할부 구매, 작동 불능 및 결함 설계, 계획적 구식화, 그리고 빈번한 피상적인 "패션" 변화와 같은 장치를 사용하여 지속적이고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멈퍼드는 또한 거대한 계층적 조직을 인간을 구성 요소로 사용하는 기계인 ''메가머신''이라고 지칭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멈퍼드의 문명 단계 이론을 특징짓는다. 멈퍼드에 따르면, 가장 최근의 메가머신은 현대의 기술 관료주의적 핵 강대국에서 나타난다. 그는 크렘린과 펜타곤으로 대표되는 소련 및 미국의 권력 복합체의 예를 들었다. 피라미드 건설자, 로마 제국, 그리고 세계 대전의 군대가 이전의 예이다.
그는 회계와 표준화에 대한 세심한 주의, 그리고 군 지도자를 신성한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이 역사 전반에 걸쳐 메가머신의 자발적인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확대된 파라오를 특징으로 하는 이집트 그림의 반복적인 성격, 마오쩌둥과 요시프 스탈린과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의 확대된 초상화의 공개 전시와 같은 예를 인용한다. 그는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나치 독일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는 역사적 단편들에서 양적 회계 기록이 압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인용한다.
이러한 메가머신의 건설에 필요한 것은 "서보 유닛" 역할을 하는 거대한 인간 관료제이며, 윤리적 관여 없이 작동한다. 멈퍼드에 따르면, 조립 라인, 또는 즉각적이고 세계적인 무선 통신 및 원격 제어와 같은 기술적 개선은 특정 유형의 의심스러운 행동에 대한 영원한 심리적 장벽을 쉽게 약화시킬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예는 아돌프 아이히만으로, 그는 홀로코스트를 지원하는 물류를 조직한 나치 관리였다. 멈퍼드는 이러한 메가머신의 극단적인 목표를 순순히 수행하려는 사람들을 "아이히만"이라고 통칭한다.
3. 4. 도시 문명 비판
멈퍼드는 문명 사회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양식을 주제로 한 저작과 기술론을 중심으로 현대 문명을 비평했다. 초기 저서 《허먼 멜빌》은 허먼 멜빌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초기 도시 생활에 대한 글에서 멈퍼드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인류가 전기와 대중 통신을 사용하여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2차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 발전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초기 건축 비평은 헨리 홉슨 리처드슨, 루이스 설리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역사의 도시》(The City in History)는 1962년 미국 전미 도서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16] 이 책에서 멈퍼드는 도시 문명의 발전을 탐구하고 도시 팽창을 비판하며, 현대 도시의 구조가 서구 사회의 많은 사회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멈퍼드는 도시 계획이 사람과 생활 공간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세 도시를 이상적인 도시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현대 도시가 붕괴로 끝난 로마 도시와 유사하며, 같은 방식으로 계속된다면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멈퍼드는 도시가 "대지의 산물...자연의 사실...인간의 표현 방식"이라고 믿으며 도시 문화를 비판했다.[17] 그는 도시 문화가 직면한 위기를 인식하고, 성장하는 금융 산업과 정치 구조에 불신을 품었으며, 이러한 기관들이 지역 공동체 문화를 육성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했다. 멈퍼드는 "대도시 금융", 도시화, 정치, 그리고 소외를 경계하며, "도시의 물리적 설계와 경제적 기능은 자연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 공동체의 정신적 가치에 종속된다."라고 주장했다.[18]
3. 5. 생물기술(Biotechnics)
멈퍼드는 생태학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술을 '생물기술'이라고 불렀다.[13] 그는 생물기술적 의식과 공동체가 인간 생명의 본질에 대한 다윈적 사고의 진화에서 더 늦은 단계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거대기술"의 자멸적 동기를 떨쳐버리는 데 필요한 기술이라고 믿었다. 멈퍼드는 가장 초기의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태적 의식을 인식했지만, 부상하는 생물기술을 신다윈주의적 의식, 즉 산업화 이후의 사고 형태로 여겼다. 이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상태와 그 환경의 상태 사이의 상호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외면하지 않는 사고 방식이다. 멈퍼드의 생각 속에서 생물기술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는 그 통합적인 관계를 위해 기술을 억제할 것이다.멈퍼드에 따르면, 거대기술적 맥락에서 등장한 다양한 기술은 우리에게 물려준 혜택과 함께 의도하지 않은 유해한 부작용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그는 (기술로서의) 돈의 발명이 부작용으로, 부를 추상화함으로써 객체-부의 부담스러운 측면을 제거했기 때문에 과도한 축적의 비합리적인 맥락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부가 추상적이지 않았던 시대에는 풍요로움이 그것을 획득하는 것을 조직하는 원리로 작용했다 (예: 곡물, 토지, 동물로 측정된 부는 만족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 부를 질이 아닌 순수한 양으로 간주하게 해주는 돈은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거대기술의 한 예이다.
멈퍼드는 생물기술 사회는 기술이 끊임없이 확장되어 자체적인 힘을 확대해야 한다는 거대기술적 망상에 굴복하지 않고, "생존 가능성"을 창출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러한 망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력 추구라는 거대기술 대신, 생물기술 사회는 멈퍼드가 "풍요"라고 부르는 것, 즉 자원과 필요 간의 항상성 관계를 추구할 것이다. 생물기술 사회가 동물이 이용 가능한 음식과 관계를 맺는 방식(자연스러운 만족의 상황에서 기술 발전의 추구는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서"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으로 기술과 관계를 맺는다고 제안하면 이러한 풍요의 개념이 더 명확해진다.
따라서 생물기술 사회에서 공기의 질, 음식의 질, 물의 질은 모두 그것들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기술적 야망을 제한할 수 있는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다. 소음, 방사선, 스모그, 유해 화학 물질 및 기타 기술적 부산물의 예상되는 부정적 가치는 새로운 기술 혁신의 도입을 상당히 제한할 것이다. 멈퍼드의 말에 따르면, 생물기술 사회는 "질적 풍요, 진폭, 공간, 양적 압력과 군중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할 것이다.
도시 비판과 인간의 신체의 본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도시의 그의 비전은 도시 생활과 도시 디자인에 대한 멈퍼드의 모든 작업에 필수적이며, 멈퍼드가 그의 멘토인 패트릭 게디스에게서 얻은 "생존 가능성"이라는 개념인 생물기술의 초기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멈퍼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의 열렬한 독자였다.[14]
3. 6. 종교와 영성
멈퍼드는 도시 계획 분야에서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주목한 최초의 도시 계획 학자 중 한 명이다.[20][21] 멈퍼드는 그의 저서 ''살아있는 신앙''(1940)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영적인 삶과 실질적인 삶을 분리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양쪽에 똑같이 작용하는 저주이다.[22]
4. 저작
멈퍼드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이 연도별로 정리할 수 있다.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1922년 | 유토피아 이야기[29] | |
1924년 | 지팡이와 돌 | 이듬해 독일어로 번역됨 |
1926년 | 건축 | 미국 도서관 협회 "목표를 가지고 읽기" 시리즈 |
1926년 | 황금 시대 | |
1929년 | 허먼 멜빌 | |
1931년 | 브라운 시대: 미국의 예술 연구, 1865–1895 | |
1934년 | 기술과 문명 | "삶의 갱신" 시리즈 |
1938년 | 도시의 문화 | "삶의 갱신" 시리즈, 타임지 표지에 등장 |
1939년 | 인간은 행동해야 한다 | |
1940년 | 삶을 위한 믿음 | |
1941년 | 건축 속의 남부 | |
1945년 | 도시 개발 | |
1946년 | 생존을 위한 가치 | |
1944년 | 인간의 조건 | "삶의 갱신" 시리즈, 스탠퍼드 대학교 퇴직 |
1947년 | 그린 메모리즈 | 아들 게데스 멈퍼드의 전기 |
1951년 | 삶의 행태 | "삶의 갱신" 시리즈 |
1952년 | 예술과 기술 | |
1952년 | 현대 미국 건축의 뿌리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기계의 미술과 공예』 게재 |
1954년 | 정신의 이름으로 | |
1955년 | 지팡이와 돌과 브라운 시대 개정판 | |
1956년 | 바닥부터 | 에세이 모음 |
1956년 | 인간의 변형 | |
1961년 | 역사 속의 도시 | 전미 도서상 수상 |
1963년 | 고속도로와 도시 | 에세이 모음 |
1967년 | 기술과 인간의 발전 | 기계의 신화 1권 |
1970년 | 권력의 펜타곤 | 기계의 신화 2권 |
1968년 | 도시 전망 | 에세이 모음 |
1979년 | 나의 일과 나날: 개인 연대기 | |
1982년 | 삶의 스케치: 루이스 멈퍼드의 자서전 | |
1986년 | 루이스 멈퍼드 독자 | 도널드 L. 밀러 편집 |
멈퍼드는 1939년 영화 ''도시'' 제작에 참여했고, ''뉴요커''에 "The Sky Line" 칼럼을 기고했다.[30][31]
4. 1. 주요 저서
- 1922년 ''유토피아 이야기''[29]
- 1924년 ''지팡이와 돌''
- 1926년 ''건축'' (미국 도서관 협회 "목표를 가지고 읽기" 시리즈)
- 1926년 ''황금 시대''
- 1929년 ''허먼 멜빌''
- 1931년 ''브라운 시대: 미국의 예술 연구, 1865–1895''
- "삶의 갱신" 시리즈
- * 1934년 ''기술과 문명''
- * 1938년 ''도시의 문화''
- * 1944년 ''인간의 조건''
- * 1951년 ''삶의 행태''
- 1939년 ''인간은 행동해야 한다''
- 1940년 ''삶을 위한 믿음''
- 1941년 ''건축 속의 남부''
- 1945년 ''도시 개발''
- 1946년 ''생존을 위한 가치''
- 1952년 ''예술과 기술''
- 1952년 ''현대 미국 건축의 뿌리''
- 1954년 ''정신의 이름으로''
- 1956년 ''바닥부터'' (에세이 모음)
- 1956년 ''인간의 변형''
- 1961년 ''역사 속의 도시'' (전미 도서상 수상)[10][16]
- 1963년 ''고속도로와 도시'' (에세이 모음)
- ''기계의 신화'' (2권)
- * 1967년 ''기술과 인간의 발전''
- * 1970년 ''권력의 펜타곤''
- 1968년 ''도시 전망'' (에세이 모음)
- 1979년 ''나의 일과 나날: 개인 연대기''
- 1982년 ''삶의 스케치: 루이스 멈퍼드의 자서전''
- 1986년 ''루이스 멈퍼드 독자'' (도널드 L. 밀러 편집)
;영화
- 1939년 ''도시''
;기사
- 1949년 1월 8일, ''뉴요커'' "The Sky Line" 칼럼, "산 자와 죽은 자"[30]
- 1950년 2월 4일, ''뉴요커'' "The Sky Line" 칼럼, "시민의 미덕"[31]
4. 2. 번역서 (한국어)
- 김종달 역, 《기계의 신화 2: 권력의 펜타곤》 (경북대학교출판부, 2012)
- 김영기 역, 《역사 속의 도시》 (명보문화사, 2001)
- 김문환 역, 《예술과 기술》 (민음사, 1999)
- 문종만 역, 《기술과 문명》 (책세상, 2013)
5. 수상 및 서훈
- 1964년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10]
- 1975년 명예 대영 제국 훈장 2등급(honorary KBE영어, 외국인대상 정원외) 수훈.[10]
- 1976년 시노 델 두카 세계상 수상.[10]
- 1986년 국가예술훈장 수훈.[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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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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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macad.o[...]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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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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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olleg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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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Planning 'Secular'? Rethinking Religion, Secularism, and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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